Duke Chang Nam Lee
재일교포, 일본서핑 1세대, 78년 치바 챔피언,
그리고 한국 서핑문화의 역사를 만든 개척자,
듀크 이창남 선생님의
파도와의 대화를 담은 이야기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한국 서핑포인트 탐사에 대한 에피소드!
*일본식 단어나 특유의 언어들은
듀크 선생님의 표현을 살리고자 최소한의 교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창남 선생님, 이전에 일본에 지낼때 이치노미야의 선라이즈 앞에서 만나뵙고, 5년만에 제주 서핑대회에서 다시 뵙게 되었는데요. 치바의 Seasong이라는 일본 서핑 문화로도 역사적인 공간에 한국인의 이름이 걸려있어서 항상 궁금했었는데, 이제 자세히 이야기를 듣게될수 있어서 너무 즐거운 시간입니다. 한국서핑의 역사를 만들고 기록해가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1. 많은 한국의 서퍼들이 궁금해할 것 같은데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릴게요.
저는 1952년생이고 출생지는 일본 도쿄입니다. 국적은 한국이고 재일교포 2세가 됩니다. 부모님의 고향은 제주도의 동쪽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와 신창리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강점 때문에 삶이 어려워졌던 고향을 떠나서 일본으로 넘어오셨던 것입니다.
2. 일본에서도 서핑 1세대로 알고 있어요. 서핑을 처음하게 된 계기와 일본에서의 서핑스토리를 알고 싶습니다.
1960년대 일본에서는 서핑이 TV나 잡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정도의 시대였습니다. 수영을 잘했던 나는 매우 흥미롭고 한 여름에 한두 번 가는 바다에서 에어매트에서 서핑의 모방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18세(1970) 때, 어느 일본의 친구의 집에 놀러 갔는데, 창고 안에 우연히 먼지가 쌓인 중고 롱 보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보드 혹시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팔아주라"고 물어봤더니 6,000엔 (한화 6만 원, 지금이라면 20만 원 정도)로 좋다고 그 친구는 답했지요. 이것이 내 인생이 서핑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서핑의 길은 쉽지 않았지요. 지금의 SNS처럼 정보를 얻는 수단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포인트의 장소, 파도가 있는지 없는지의 예측, 기본 기술 등을 배우는 수단, 그리고 리쉬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왁스의 구입이나, 보드의 수리 방법도 아는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거품파도를 타는 것이 즐겁고 약간 짧은 보드에서도 서서 탈 수 있게 되면서 2년 후에 해변의 서핑 샵에서 아르바이트 일을 찾아 보드 수리를 하면서 매일 열심히 연습하고 첫 출전 대회에서는 태풍 컨디션 속에서 입상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시간이 있는 한 바다에 다니면서 출장(출전)할 수 있는 대회에는 계속 나가 상위 입상 성적을 셀 수 없을 정도로 얻었고, 1978년에는 치바 챔피언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이 타이틀은 당시 프로 선수 인정을 평가받는 대회였습니다.
그러나 머릿속에서는 이후의 서핑과 삶의 방향에 대해서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서핑계에서는 프로라고 해도 수입이 낮아 도저히 생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재일 교포는 일본 사회의 취업 차별 때문에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결론은 서핑을 계속할 수 있는 수입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시험공부를 하고 합격하면 다시 복귀 하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2년 후 합격률 5%의 전기기사의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나는 다시 서핑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년의 블랭크(휴식기)는 있었지만 서핑 업계에서는 보드와 슈트의 제공 스폰서 이야기가 몇 가지 있었으며, 그 후 10 년간은 선수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고 대회에서도 상위 입상의 성적도 계속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성적은 2005년(54살 때) “Sea Song컵 레전드 부문” 우승이었습니다.
3.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을 고국으로 여기면서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지키시면서 사시는 것 같아요. 서퍼로서, 엔지니어로서 어떠한 시선으로 한국을 보셨는지 알려주세요.
저는 전기 엔지니어로서 일본 기업에서 포항제철소 건설의 설계에 관련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사 내의 일부 일본인 직원은 식민지 통치자의 정신이 아직 남은 탓인지 한국인인 저에 대한 태도는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고 때로는 괴롭힘 그 자체였습니다. 결국 나는 그 직장에서 싸우다가 그만두게 되었고, 나의 마음은 그들에 대한 반항심이 더욱더 커져갔고 그러면서 한국에 대하여 점점 더 관심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88 올림픽 때였지요. 이 올림픽에서는 윈드 서핑의 종목이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해외에서는 윈드 서핑보다 파도를 타는 서핑이 역사도 오래되었고 인구도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도 서핑 인구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제멋대로 생각하게 되었지요.
4. 일본에도 좋은 스팟들이 많고 서핑트립을 이곳저곳 다니셨을 것 같아요. 그런데 90년도에 처음으로 서핑트립을 오시게 된 이유와 한국의 서핑포인트 탐사 에피소드가 너무 궁금합니다.
특히 제주도를 고향처럼 생각하시고 자주 오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제주도를 왜 가장 좋아하시는지요?
1990년까지 나는 주말마다 일본 치바의 바다에 다녔고, 연휴, 휴가 등 시간이 있을 때에는 하와이, 발리에도 다녔지요. 그런데 1990년의 5월, 3개월의 출장 중에 3일간의 휴가가 나왔기 때문에 이전부터 궁금했던 한국을 첫 방문 하기로 했습니다. 목적지는 출장처와 가장 가까운 부산. 비행기는 남해안에서 김해공항으로 착륙하려는 태세였습니다. 남해안의 지도는 미리 머리에 기억하고 있었지만 창가부터는 낙동강이 보이고 바로 아래를 본 순간 서핑에 적합한 깨끗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다대포였습니다. 길도 모르고 교통수단이 없어서 다대포 해안에는 갈 수 없었고 그대로 짧은 휴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4개월 후 제 고향인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역시 교통수단이 없고 여기저기 헤매던 끝에 찾았던 것은 월정리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확실히 서핑이 가능하다고 확신한 나는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포인트 탐사를 실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90년~94년까지는 서울부터 교통편이 좋은 강릉, 속초를 시작으로 포항, 부산 등 동해안을 중심으로 탐사했고, 많은 포인트를 찾을 수 있었지만, 경포대나 낙산해수욕장등 유명한 관광지를 한걸음 떠나면 군부대시설과 철조망 등 통제지역이 많았고, 바다에 들어갈 수 있어도 총을 둔 군인과 사치라이트(큰 조명) 시설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극도의 긴장감이 느껴져서 서핑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는 정말 파도는 좋았지만 사회의 환경은 그런 시대였습니다.
동해안의 포인트는 대략 찾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95년부터 고향인 제주도에서 포인트 탐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중문을 시작으로 몇 군데 포인트를 찾는 중에 어느 기업으로부터 서핑 스쿨 개교 제안을 받았습니다. 나는 강습용 보드 4장과 바디 보드 4장, 필요한 부속품을 가지고 제주도에서의 새로운 출발과 정착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아쉽게도 무산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과 서핑 장비만 남은 가운데 자신이 한국에서 서핑의 창시자이자 서핑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은 더욱더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파도의 조건이 가장 좋은 중문 해수욕장에서 인명 구조의 자원봉사와 서핑 보급 홍보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당시 중문 해수욕장은 높은 파도와 빠른 조류 때문에 해수욕객이 휩쓸리는 사고가 다발하는 해안이었습니다. 거기서 서핑 보드를 이용한 인명 구조법은 매우 효과적이었고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어, 해경이나 안전 요원까지도 바디보드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997년 경이되자 서핑에 대한 유익성은 색달동 동네, 경찰, 해경, 소방서까지 공유되어 자유롭게 서핑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습니다.
이 시기의 중문해수욕장은 서핑을 타는 사람이 저 혼자만이었고, 밀려오는 좋은 파도를 독점적으로 탈 수 있다는 것에 좋으면서도 죄악감까지 느껴졌습니다. 곤란한 시기도 맛보았지만 그에 해당한 쾌감과 보람은 더 커졌던 것입니다. 나는 안전 요원 중에서도 수영을 잘하고 서핑에 관심이 깊은 몇 명에게는 서핑을 가르쳐 주기로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색달동 청년회 회장이었던 (고인) 김태오는 가장 열심히 연습했고 나도 그의 열정에 답하도록 지도했습니다. 김태오에 이어 젊은 로컬들도 점점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고 그 시점에 나는 지역서퍼들의 모임 만들기를 촉구한 결과 98년에는 제주웨이브 클럽이 결성되었습니다. 로컬 서퍼들은 제가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에 있어서 제주도에 갈 때마다 환대해 주었고 나는 로컬서퍼들이 필요한 서핑장비에 불편이 없도록 신경 쓰면서 서로의 인연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깊어졌습니다. 그 후 2003년 8월에는 국내 최초로 서핑대회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5. 중문색달해수욕장에는 듀크포인트라는 리프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포인트의 이름도 선생님의 별명을 따라 ‘듀크’라고 불리는 것으로 아는데요. ‘듀크’라는 별명이 어떻게 붙게되었는지, 듀크포인트도 선생님의 별명을 갖게 된 스토리도 듣고 싶습니다.
한국 포인트 탐사를 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한국사람들에게 서핑에 관해서 질문했습니다. 주로 스쿠버 다이빙과 윈드 서핑, 웨이크 보드, 스키 등의 관계자였지만, 서핑에 대해선 모두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한국에서의 첫 서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서핑의 세계적인 전도자인 하와이의 "DUKE KAHANAMOKU"에서 듀크를 뽑아서 나의 별칭으로 했습니다. 제주도의 듀크포인트는 97년 내가 해녀의 집 앞의 파도를 처음 탔기 때문에 그대로 "듀크 포인트"로 한 것입니다.
6. 제주도로 서핑트립을 젊은 시절부터 많이 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서핑스팟 중 기억나는 곳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곳 에피소드를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서핑 10명이 구속된 에피소드도 듣고 싶어요.
96년 8월 태풍이 접근해서 중문은 파도가 너무 높아서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렌터카도 성수기 때문에 빌릴 수 없어서 시외버스를 타면서 포인트 탐사를 했던 그날, 버스가 모슬포를 지나면서 창가부터 보였던 믿을 수가 없는 멋진 파도가 보였습니다. 순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가 뛰면서 뒤돌아가서 눈앞에 보였던 파도는 마치 발리의 울루와투나 메데위를 상기시키는 환상적인 대한민국 최고의 파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포인트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위험도 이기도 합니다.
<제주도 서쪽의 어항 포인트에서 발생했던 사건>
15년 정도 전 태풍이 접근하고 풍랑경보가 발령된 속에서 로컬서퍼 10명이 이 포인트에 들어갔습니다. "서퍼가 파도에서 떨어져 물 위에 올라오지 않는다"라는 주민의 오해 신고를 받고 해경이 출동하다가 서퍼 10명 모두가 구속당했습니다. 벌금은 1인 80만 원, 합계 800만 원, 하지만 이전부터 중문해수욕장에서의 수많은 인명구조의 업적도 있어 결국 10명 모두 석방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바뀌지만, 96년 처음으로 벌초로 방문한 곳이 바로 이 포인트의 입구였습니다. 조상이 나를 여기에 불렀는지,,,
7. 지금 제주도는 발전과 개발이라는 모습의 뒤편에 사라져가는 자연환경과 모래의 유실로 인한 해변의 변화 등을 겪고 있어요. 과거에 존재했지만 개발로인해 사라진 서핑스팟에 대해 안타까움이 가득하고 또 궁금한 것도 많아요. 파도가 얼마나 좋았고 아름다웠을까? 기억나는 몇 군데에 대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라진 파도...
그곳은 제주도 안덕면 화순해수욕장 입니다. 이 포인트는 96년도에 찾아냈지만 중문과 함께 매우 좋은 파도였습니다. 관광객도 많았고 활기찬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항구 건설과 함께 해안 모래가 깎여 거대한 방파제가 건설 된 후에는 백사장과 파도가 사라졌습니다. 항구건설에 대한 반대운동도 격렬했지만 경치를 가로막는 커다란 방파제와 해수욕장이 사라진 지금은 한산하고 조용한 동네로 변해 버렸습니다.
8. 몇십 년간 서핑을 해오면서, 서핑이라는 게 삶을 변화시켰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텐데요. 듀크 선생님이 추구하는 서핑, 그리고 서핑과 삶의 밸런스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서핑은 '쓸데없는 힘을 사용하지 않고 파도와 대화' 한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젊었을 때에는 파도를 정복하려고 많은 힘을 사용했지만, 경험을 쌓으면 파도의 힘을 잘 활용하는 수법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 서핑을 오랫동안 계속할 수 있지요. 서핑과 삶의 균형은 젊었을 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핑을 중심으로 생활의 구조를 구축합니다. 또한 스트레스를 피하고 수입이 많아도 과도한 일을 하지 않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지요.
9. 제주도에 오시면 항상 드시는 음식이 있을까요? 그리고 평소 체력관리를 위해 드시는 식단도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제주도에 올 때마다 먹는 것은 해산물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은 해물뚝배기이지요. 그 외에는 신선한 회(전복, 성게, 한치, 고등어 등)입니다. 평소 (일본에 있을 때)는 체중이 증가하지 않도록 식재료에는 신경을 쓰지만 한국과 같은 취향입니다. 물고기와 조개류의 회와 돼지고기, 닭고기등을 섭취합니다.
10. 2003년 8월 11일~12일까지 제주도 중문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서핑대회가 열린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번 2024년 제주서핑대회도 오셔서 직관하셨는데, 이전보다 서핑인구도 많아졌고 많은 서핑샵과 선수들의 기량도 높아진 걸 느끼실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의 서핑문화와 비교해 보면 차이점도 많이 느끼 실 것 같고요. 과거와 비교해서 어떤 점들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한국의 서핑이 어떻게 발전하면 좋겠는지 말씀해 주세요.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 경부터 서핑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오늘까지 약 25년 정도의 역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약 40년 빠른 60년 경부터 서핑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25년 후인 85년쯤에 피크를 맞이했습니다. 한국도 일본도 서핑 인구가 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보드 브랜드, 슈트 브랜드, 서핑샵, 숙박시설이 생겼다는 형상은 비슷하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을 볼 수 있습니다. 85년경 일본에서는 서핑에 대한 사회적 인상은 결코 좋지 않았습니다. 급격한 서핑 인구 증가에 대한 서핑 문화, 즉 교육의 보급이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서핑 룰과 매너의 문제, 사회적 질서(과대한 음향, 쓰레기 처리 등)를 무시하는 행위가 눈에 띄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서핑 기술면에서도 지금과 같은 동영상, SNS 등의 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서퍼들은 무분별하게 무작정 오로지 연습할 뿐이었습니다. 프로 단체도 결성되었지만 권위주의와 폐쇄적인 체질이었기 때문에 해외 서퍼들의 참가 기회(교류 기회)도 없이 기술 수준의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서핑 자체가 사회적 지위를 얻지 못했고 기업 스폰서의 지원도 미약했습니다. 인구만 많고 규모가 작은 스포츠에 매몰된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룰과 매너 측면에서는 서핑스쿨이 선도하고 초보 단계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다만 바다는 있어도 한국은 파도가 작은 상황이 많고 또한 서핑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혼잡하면서 안전사고의 증가가 우려됩니다. 웨이브 파크와 같은 시설은 매우 좋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한 곳 만이고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많은 서퍼들이 즐길 수 있는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포인트의 개척은 서둘러야 하는 과제입니다. 특히 여름에는 남해안을 시작해서 서해안 남부는 스웰이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술 수준의 면에서는 일본의 서핑 역사가 40년 빨리 시작된 것에 비교해 한국은 2배의 스피드감을 느낍니다. 한국인은 일본사람보다 많이 연습하고 꾸준히 노력하는 편이지요. 앞으로는 서핑스쿨의 강습 내용을 지금보다 폭넓게 중급자부터 상급자 수준에 이루는 과정에서 이론적 분석과 지도 방책이 정리된 교육시스템의 구축을 충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11. 한국의 올바른 서핑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배러댄서프’에게 마지막으로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배러댄서프를 응원합니다. 제가 제주도를 30년간 다니면서 올 때마다 삶의 에너지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배러댄서프도 제주도의 자연의 에너지를 받으시면서 앞으로의 많은 발전을 기원합니다.